[피플] <한국의 암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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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신반리 암장
인수봉대보수사업
 
 
 
  제34기 암벽반 수료기, 김운영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11-05-24 22:41     조회 : 18144    

제34기 암벽반 수료기 (김운영)

 

영화 <허브>에서 여주인공(한지혜)은 호기심 많고 쾌활하다. 귀엽고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과감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는 남자주인공(이천희)과 함께 암벽장에서 인공암벽등반을 경험한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을 거라는 남자주인공의 생각을 넘어서서 여주인공은 인수봉에 오를 것을 목표로 세우고 한 발 한 발, 한 손 한 손에 정성을 들인다. 부러질 것만 같은 여주인공 한지혜의 가녀린 팔다리는 의외로 암벽장에서 돋보인다.

우월한 기럭지를 입증이라도 하듯 성큼성큼 올라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암벽은 남자만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고정관념이었음을 보여준다. 내가 소속한 회사가 암벽체험을 권유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자의든 타의든 암벽등반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나는 헬스장에서 하는 근력운동보다는 배드민턴처럼 콩콩거리며 땀을 많이 내거나 수영처럼 움직임이 큰 운동을 좋아한다. 암벽등반을 운동이라기보다는 직업이나 하나의 대회종목으로 생각하고, 모든 근육을 사용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특징을 모른 채 등반을 시작했다. 첫 주부터 고비였다.

평소 운동을 얼마나 안했으면 체험할 암벽에 오르기 전에 한 시간 남짓 오르는 산길이 마라톤같이 느껴졌다. 숨이 턱까지 찬다는 표현은 양반의 언어라고나 할까? 폐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소위 말하는 저질 체력이 탄로 난 것 같아서 힘들기 보다는 민망했다.

 등산가방이 무거워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암벽을 오를 두려움보다도 앞으로 네 번 더 남은 산행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눈앞의 암벽은 모든 생각을 중지시켰다. 지금도 이날 점심이 김밥이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예전에 집 뒤의 산에서 암벽을 여러 번 올라봤음에도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고 생각하자 부담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암벽을 오르기 전에 교장선생님이 장비의 종류와 매듭짓는 방법을 설명하셨고 첫 주는 그렇게 지나갔다.

첫 주만큼 힘들 거라 생각했던 둘째 주의 산행은 긴장을 바짝 해서였을까, 의외로 수월했다. 처음 배울 등반은 암벽등반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인 슬랩등반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선등으로 먼저 올라가시고 등산학교 학생들의 차례가 되었다. 슬랩등반을 간단히 설명하면 경사가 40-70도 되는 바위를 특별한 기술을 쓰지 않고 오르는 등반이다. 가장 기초라고는 하나 첫 발을 떼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생 중의 누군가가 먼저 올라가서 성공을 알린다면 왠지 나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이 암벽에 닿았는지 몇 몇 학생들이 오르기 시작했고 나도 편한 마음으로 올랐다. 손가락을 오므려라, 무릎을 쫙 펴라, 자신 있게 해라, 떨어져도 괜찮다, 벽을 너무 사랑하진 마라, 너무 욕심내지 마라, 등의 말들이 밑에서 솟구쳐 올랐지만 말은 말일뿐, 실행해보기도 전에 이내 사라졌다. 목표는 오르는 것. 우선 올라가고 보자는 마음으로 동작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뒤를 돌아보며 하강하라는 말 한 마디만 기억에 생생했다. 많고 많은 말 중에 내려가라는 말이 가장 반가워서가 아니었나 싶다. 하강 뒤 손끝에서 전해오는 짜릿함과 쓰라림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셋 째 주는 크랙등반 수업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랬다. 바위 사이사이의 크랙(우리말로 틈)에 손이나 주먹, 발을 넣어 올라가는 기술로 여기저기서 기합 소리와 함께 악악 대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도 힘이지만 요령 없이 올라만 가려는 자세는 바위틈에서 손가락 지문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천천히 올라가도 된다는 말이 땅에 발을 내딛었을 때 떠올랐다. 왜 바위에 매달려서는 안쪽 바깥쪽도 분이 안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넷 째 주는 실전의 날이랄까. 삼 주 동안 배운 기술을 총 동원하여 중·상급자 코스에서 암벽을 등반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삼 주 동안 배운 기술만 가지고는 무리였다. 이래서 마지막 주에 있을 인수봉 졸업등반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됐다.

  이젠 적응이 좀 됐다 싶어 바위를 오를 땐 밝은 곳을 향하는 기분이었는데 이보다 몇 배 더 높은 바위에 오를 생각을 하니 왠지 매듭짓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고 위험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물론 실제로 바위를 오르면서 느낀 점은 암벽등반이 절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첫 날보다는 마지막 날이, 등반보다는 하강할 때 사고 날 확률이 높다는 말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일요일 저녁마다 삼 주 연속으로 먹던 오리고기에 질려갈 때쯤 보쌈에 칼국수를 먹었다.

  오리와는 다른 육질의 보쌈은 턱관절을 즐겁게 했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입속으로 딸려 올라오는 칼국수의 밀가루 냄새가 은은하고 좋았다. 집에 와서는 밤에 선잠을 자다 두 번 경기를 일으키고는 그 자세 그대로 아침을 맞이했다.

  근육통은 이틀 뒷면 말끔히 사라졌다. 마지막 주는 유독 날씨가 좋았다. 그래서 아무 사고 없이 인수봉을 점령(?)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해서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인수봉에 오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첫 피치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중간도 못 올라갔지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돌아보니 왠지 정상에 도달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중간 중간에 매달려 경쟁이라도 하듯 다른 등산학교에서 온 사람들이 바위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먼저 올라가겠다는 의욕이 가득했다. 나는 의욕이 충만했지만 실력이 부족하여 나를 확보해준 선생님의 팔 힘으로 허공에 뜬 채 딸려 올라간 격이 되었다. 그 바람에 무척이나 빨리 인수봉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저 인수봉에 서있는 것 하나만으로 신기하고 뿌듯했다.

  건너편 봉우리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 우리를 부러워 할 거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그 쪽을 향해 손을 신나게 흔들어주기도 했다. 인수봉에서 먹은 점심은 일반 등산을 할 때 먹은 점심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하강만 남겨놓은 채 내려다보니 그때서야 평소 올랐던 바위의 몇 배를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짧은 코스(약 60m)로 내려가는 거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밑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 상태에서 짧은 코스는 가늠하기 힘든 거리였다. 두렵지 않은 척을 하며 하강기를 단단히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하강의 끝 무렵이었는지 학생들 대부분이 내려와 있었다.

  4주간의 암벽등반 과정 때와는 다르게 학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보다는 승리자의 여유 비슷한 기색이 보였다. 마지막 5주를 다 끝냈을 뿐 아니라 그간의 과정을 통해 인수봉을 등산길이 아닌 바위로 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비록 암벽등반의 시작은 남에 의한 것이었어도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모두 깨달은 것 같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대장을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한 조로 움직여서 협동을 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쾌거였다는 점이다.

  암벽등반을 하면서 나름 생긴 근육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이정도 속도라면 내가 암벽등반을 했다는 증거는 안타깝게도 사진으로만 남을 것이다. 아무 사고 없이 5주 과정 수업을 성심껏 가르쳐주신 김용기 등산학교 선생님들께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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